순환되는 자본의 메타포


조은정(미술평론가) 


편의점 앞 노상에 아무렇게나 놓인 파랗고 빨간 물건, 유원지 파라솔 밑에 어김없이 존재하는 파랗고 빨갛고 노란 것. 값싼 물건의 대명사이자 현대적 공산품의 소모를 상징하는 플라스틱 의자이다. 김우진은 이 플라스틱 의자를 재료로 사용한다. 플라스틱 의자의 형상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지만 작가의 선택에 의한 최선의 형태를 취한 그의 작품들은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산업의 물질로 자연인 말이나 사슴을 조각한 그의 작품은 재료 자체가 작품의 주제이자 동시에 그저 선택된 재료에 불과하기도 한 이중적 상황을 야기한다. 동물의 형태를 이해하기 위하여 식물적 사유를 통과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자연의 말이나 사슴이라는 구체성을 담보로 한 형상의 이면에 위치한 상징의 강을 건너야 그의 작품이 추구하는 본질에 이를 수 있음은 너무도 당연한다. 


사육과 소비의 구조에서 동물을 보다


작가 김우진은 ‘동물’을 만든다. 왜 동물을 만드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그는 거침없이 어린 시절 꿈이 사육사였노라고, 그래서 동물을 만든다고 대답한다. “아, 참 멋진 직업을 원했었구나.”라고 모든 이들이 생각할 거라고 추측했는데 정작 작가의 경험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엄청나게 사납고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는 맹수조차 그 앞에서는 온순해지고 아이처럼 만들게 하는 멋진 직업의 소유자로서 사육사가 아니라 “짐승 따위를 먹이고 기르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란 사전적 정의로 이해되는 사회니 그럴 만도 하다. 실지로 사육사가 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안 작가가 자신만의 동물들을 만드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리하여 하필 동물일까라는 물음은 해소된다. 그럼에도 말, 사슴을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그의 세계는 그가 단순히 ‘사육사’의 꿈을 조각가로 이루려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격세지감(隔世之感). 채식으로 바꾼 자신이 얼마나 평화를 실천하는지, 몸이 얼마나 정갈해졌는지 역설하는 장면과 마주한 경우가 있다. ‘편식’이라는 장애를 극복하고자 각고의 노력 끝에 고기 몇 점 먹을 수 있게 된 필자의 가당찮은 ‘격세지감’이란 용어의 사용은 그래서 정당하다. 육식을 못하는 것이 차별받는 이유였는데 이제는 육식이 억압의 기제임을 느낀다. 평화와 생명존중의 상징으로서 채식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생명을 살상하는 ‘야만의’ 상태인 육식에 맞서는 고귀한 행동이지만, 육식과 채식은 단지 먹거리만의 문제가 아닌 경제와 사상, 정치적 배경이 혼합된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리처드 W. 블리엣이 지적한 것처럼 동물이 제공하는 제품을 소비하면서도 현대인들은 도축의 과정을 생각하며 역겨움이나 수치심, 죄의식을 느낀다. 하지만 육류소비가 많지 않은 동아시아에서 채식=가난에서부터 유기농의 열풍 뒤 채식=웰빙의 구도가 성립된 것만은 분명한 듯 싶다. 


먹잇감으로서의 동물은 과거 사냥에 능한 이들의 차지였을 것이며 상대적인 허약체들은 식물이 섭취의 주대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식량을 위한 사냥이 존재하지 않는 현대에 우리를 생육시키는 것은 식물임을 인지한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 식물에 있음을 인지하는데 그 생명성을 소비하는 것을 다시 섭취함으로써 생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근원을 찾지 못한 행위로 규정한다. 단위 사회에서 구성원 사이에 나타나는 무엇을 먹는가에 의한 차별은 사회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먹잇감으로서 동물은 ‘가축’으로 대치되었다. 소비를 위한 생산의 행위가 동물에서도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그리하여 현대인에게 있어 반려동물이라는 몇몇 종을 제외하고는 동물이란 미니어처 같은 감각의 존재일 뿐이다. 동물은 순수의 정수(精髓)와 십이지(十二支) 등의 문화적인 위치에서 해석되는 상징이 되었다. 김우진이 조각하는 동물이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의미에서 비켜나 있는 것은 그의 어린 시절 꿈이 사육사였다는 데 기인한다. 동물조각은 조각의 행위 자체이자 자신이 돌보는 생명의 의미를 넘어 자신의 존재성이 투사되어 있는 다른 물질이자 생명인 것이다.



조립되는 세포, 기억되는 생명

김우진의 동물은 어떤 작품이든 일정하게 동일한 과정을 거쳐 나타난다. 먼저 그는 철골을 이용하여 뼈대를 만든다. 그 위에 플라스틱 의자를 잘라 붙이고 고정하고 다시 칠을 함으로써 플라스틱 자체의 날것이나 플라스틱 색깔 자체의 상징을 취하지 않는다. 플라스틱 의자는 다리와 상판의 단순한 구조를 지닌 물체이다. 이를 잘라 재료화할 때 가공에 의한 반복이 나타난다. 의도치 않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단위를 이루게 되는데 반복적인 그 표면의 단위들은 팝아트의 기본적인 단위성을 상상케 한다. 리히텐슈타인의 ‘붓자국’이 시간의 물질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처럼 이 플라스틱 조각들은 스트로크로 인상지우며 동시에 생체의 세포로 존재한다. 


사실 빨갛고 노랗거나 파란색의 의자색은 ‘싸구려’의 종합편이지만, 그것의 분절된 형태들이 갖는 규칙성은 규율이나 도덕 등 미덕을 상상케 한다. 분명 표면은 하나의 단위로 일컬어질 수 있으며 이는 마치 고흐의 화면을 꿈틀거리는 선의 단위로 분절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러한 규칙성은 그의 작품이 모듈화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표면적 단위의 반복은 일률성을 부과하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표면과 깊이의 관계는 파괴되어 내부가 외부로 드러나고 내부와 외부의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머리 부분에서 그러한 점은 두드러지는데 그 우글거리는 표면은 흘러내리는 뇌수, 해체되는 형태를 암시한다. 


말이나 사슴의 구조에서 발견하게 되는 선정적 형태감은 우리 내부에 있는 피의 연상작용을 소환하고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은 현대사회의 외부와 내면의 괴리라는 불가피한 정황을 포착하게 한다. 김우진의 한없이 가벼운 재료가 주는 이 무거운 감정이 바로 그의 동물이 미니어처가 아닌 존재로 위치하게 하는 지점이다.


그의 손을 통해 동물이 되는 대상은 말, 사슴, 사자 그리고 최근 나타나기 시작한 개다. 호이트 롱은 일본에서는 사슴에 대해 세속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의 매개자로서 근본적인 상징적인 역할에 이바지했다고 지적했다. 동아시아 샤먼의 머리에 쓴 관에는 사슴뿔이 있기 마련이며 신라의 금관에서도 나무와 사슴뿔의 흔적을 발견할 때 우리는 이것이 보편성을 띤 저 먼 시대의 상징임을 확인한다. 인간과 영계의 매개자로서 사슴은 신성한 것이었으며 사람을 살리고 이끄는 존재였다. 불교에서 윤회를 설명하는 데 종종 등장하는 존재였고(니그로오다 황금사슴이야기), 아프리카에서는 먹으면 최면효과가 있는 선인장을(환각제와 문화) 사슴이라 불렀다. 사슴은 인간 생명 유지의 필수조건이었던 것이다. 말은 신라고분에서 발견되는 기마인물상에서 볼 수 잇는 것처럼 운송기관으로서 죽어서 저승길을 데려가는 존재였다. 영계(靈界)와 속계(俗界)를 잇는 장치이자 인간이 그 경계를 넘는 수단인 것이다.


가벼운 치료를 위한 시술이 영원한 잠에 빠지게 된 할머니의 어이없는 죽음 앞에서 망연하였던 젊은 작가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최근작 는 그러한 작가의 경험을 반영한다. 말이나 사슴만 보여주던 작품세계에서 인간이 말을 타고 있는 기마인물상은 예외적인 것인데, 말의 네 다리 사이가 막혀있다. 이는 능묘 앞에 선 석마(石馬)의 전통적인 표현으로서 작가가 해석하는 죽음의 세계가 전통의 코드와 맞닿아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는 실로 감각적인 문제인데, 지방에서 성장하였으므로 왕릉과 같은 거대 무덤에 대한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작가는 석마를 대입하여 이 작품을 구상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의 세계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을 그의 작품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결국 그의 작품은 아주 단순한 동물과 생명에 대한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의 표현은 ‘손에 익은’, 혹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법칙 아래 놓여 있는 매우 자율적인 것이다. 그 조형의 법칙은 또한 마치 아무 것도 아니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레고(lego)블럭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퍼즐과 레고의 세대


김우진의 조각은 덧붙여나가기의 법칙을 따른다. 헌데 그것은 철저히 계산되고 조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단위는 있으나 완벽히 정형성을 따르지는 않은 이 파편화된 조각들은 작가 스스로 만든 조합의 단위이다. 그것은 일정 부분 조립의 고정을 거쳐 형상화된다. 볼트와 너트 그리고 기다란 붓터치와 같은 판의 조립은 이들이 무한히 확장되기도 하고 최소한으로 형상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퍼즐 조각 혹은 레고 부품을 상상케 한다. 


무언지 알 수 없는 조각을 이어붙이면 새로운 형상을 보여주는 퍼즐, 기로 세로 2센티미터가 표준인 레고를 인식하며 자란 작가에게 조립은 형태를 만드는 기본으로 이해된다. 기성품을 이용한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들과 구분되는 가장 기본적인 선은 스스로 창안한 조각들의 조합이며, 이는 작가의 두려워하지 않는 노동력의 투입에 기인한다. 그는 내가 아는 젊은 작가 중 가장 치열한 시간을 보내는 작가 중 하나이다. 그는 엄청난 노동의 물리적 시간과 육체적 어려움을 감내한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각종 기념물 혹은 환경조형물이란 사업에 시간과 정력을 바치는 여타의 작가들과 비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작업실 마당에 아무렇게 선 말이나 사슴은 이곳이 그의 동물원임을 보여준다. ‘김작가와 몽구 몽실이’라는 명패를 단 개집에 사는 두 마리 개들도 작가의 식구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공간에서는 작업이라는 일상이 펼쳐진다. 존 케이지는 “일상은 예술보다 우월하다”고 했다. 나아가 “예술은 일상 속에서 살아 견디는 우리들의 축복이다.”고 했다. 동물에게 먹이를 주고 목욕을 시키고 털을 골라주며 배설물을 치우는 지난한 사육사의 하루가 작가의 작품에 대한 노동으로 묻어 있다. 마음속에 자리한 동물의 이미지를 추려내어 형상화하는 그의 작업은 노동인 동시에 놀이이다.


그는 처음 대면하는 내게 “유명해지고 싶다. 어떻게 하면 되는가”라는 질문을 하였다. 앤디 워홀이 원했다는 그 지점을 이 어린 학생이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흥미로웠다. 이어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더 넓은 세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날지 펼친 청사진은 한 예술가의 삶의 방식에 대한 성찰을 동반하고 있었다. 천박한 자본주의를 넘어선 예술에의 의지라는 고전적인 가치를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조우하는 기쁨은 컸다. 그것은 무작위로 펼쳐진 정보 속에서 그저 표면에 드러난 어떤 언어를 건져낸 것에 불과한 표현이기도 했고, 앞으로 어떤 작가가 될 것인가에 대한 작가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공산품인 레고를 집어들고 창작의 기쁨을 경험한 세대답게 정형화된 성공의 의미를 선택한 질문은 그래서 그리 무례하거나 천박한 것이 아니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화려한 색상의 레고를 집어들 듯 그렇게 자신의 주변에 있는 정형화된 형태, 스터드가 있고 일정한 크기인 플라스틱 의자를 선택하였다. 하지만 의자 다리는 분리되었을 때 스터드의 역할이 아닌 하나의 붓질로 위치한다. 그리하여 반짝이고 짙은 고유의 색을 지니고 있으며 압축적인 형태감을 갖지만 구체적이지 않은 이 형상들은 자동차를 우구려뜨려 꽉 조여 하나의 추상적 세계를 보이는 정크아트, 익숙한 형상의 가벼운 모습인 팝아트, 무한히 반복되고 스스로 모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여러 층위를 넘나든다.



자원의 윤회와 자본의 순환구조


작가가 선택한 재료는 플라스틱이다. 플라스틱은 발명되자마자 그 영구성에 대한 신뢰를 통해 조각의 재료로 선택되어왔다. 하지만 햇빛과 시간에 의해 청동이나 철보다는 분해 속도가 빨라 사라지지는 않지만 잘게 부수어 지는 탓에 플라스틱의 위상은 그 이름이 무색하게 되었다. 영구성과는 거리가 있는 일회적인, 임시의, 가벼운 등의 의미로 통용되어 재료로 선택될 때조차 그러한 속성에 의존한다. 


플라스틱 의자로 만든 동물의 형상이 위치하는 지점은 슬라보예 지젝의 논리에 따르자면, 바로 거주하지 못하는, 집 없는 인간을 인지하게 하는 각인장치가 된다. 자신의 환경에 침잠되며 고유한 본능에 의해 통제되는 동물을 인위적인 물질인 플라스틱으로 만들어냄으로써 거세된 환경을 드러나게 한다. 그럼으로써 완벽히 자연이 부재한 상황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지구가 식물과 동물이 완벽히 조화를 이루어 살던 시절, 식물은 죽어 흙에 덮여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석유와 같은 다른 물질이 된다. 그 물질은 다시 인위적 분해과정을 통해 플라스틱으로 가공된다. 자연물에서 가공물로, 식물에서 아주 다른 물질로 변환하는 이 연금술은 시공을 뛰어넘는 마법이자 세계를 가르는 지표가 된다. 그 변용은 생명의 상징인 식물이 시간과 가공을 거쳐 플라스틱으로 나타났을 때 소비와 함께 자본을 의미한다. 김우진의 알록달록한 말과 사슴의 형태 앞에서 자연과 인공이, 야성과 식물성이 공존하는 대상을 만나는 경험을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식물이 광물이 되고 다시 소비되어 공기중에 흩어졌다가 그 열기를 잃어 다시 땅으로 스며드는 과정은 끊임없는 순환, 모든 존재의 순환을 본질로 취급하는 힌두교의 윤회로 설명될 수도 잇을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이 낸 상처로 인해 그 에너지의 신체는 상흔을 입고 순환의 고리를 잠시 멈추어 표류한다. 플라스틱이 주는 엄청난 편리성에도 불구하고 맘 편히 대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김우진이 만들어낸 플라스틱 동물은 그러한 상흔이다. 게다가 인체의 편안함을 추구하여 만든 의자가 아니던가. 유원지거나 편의점 바깥이라는 자연에 노출된 장소에서의 사용을 위한 인공이라는 아이러니 앞에서 그 의자는 질료화한다.


인체에 유해하며 지구에는 더욱 치명적인 물질이지만 그것의 생산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자본의 법칙 때문이다. 이 무한 가속도가 붙은 시스템은 더 이상 제어장치가 없다. 그것은 우리의 욕망과 맞물려 커지거나 꺼지는 스위치만이 존재할 뿐이다. 더 이상 피조물이 아닌 김우진의 동물은 이런 우리의 시스템을 가시화하는 장치이다. 자원의 윤회 고리를 분실한 순간 현실계는 난관에 봉착하게 됨에도 그 시스템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멈춰지지 않는 자본의 힘 때문이다. 꺼버리거나 켜는 스위치밖에 없는 욕망의 구조에서 그가 생산한 동물들은 피조물의 미덕을 드러낸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야성적인 그 힘을 잃지 않음으로써 영매로서의 말과 사슴을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작에서 그는 인체와 부조판을 보여주었다. 자신이 돌보고 싶었던 동물에 어쩔 수 없이 투 사 되던 인간의 본성은 인체 자체로 드러난다. 이 거친 색조각의 드로잉에서 현대 산업사회의 쾌감은 우리를 욕망하게 하고 동시에 그 웅크린 자세는 반성으로 이끈다. 뿔과 꼬리가 있는 야성의 세계 속에 등장한 인체는 그가 내면으로 천착해 들어가기 시작한 징조이다. 부조판의 실루엣들이 그가 키우는 몽실이와 봉구를 알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들 것이다. 원대한 사육사의 꿈에서 일상으로 안착한 작가의 시선은 그러나 예술을 향한 일상의 영위이다. 예술보다 위대한 일상에서 그는 진정한 작가에 도달하고자 하는 꿈의 실타래를 놓지 않고 있다. 시간과 물리적 제약을 노동으로 극복하는 그는 분명 아마 실타래를 건네받아 미노타우로스 같은 자본의 울타리를 넘어 자신의 라비린토스를 빠져나올 것을 의심치 않는다. 강하고 경쾌한 플라스틱의 질감과 색감은 우리 맘을 동요시키고 동시에 파괴자로서의 인간을 인식하게 한다. 이 거대한 자본의 시장에서 그의 동물들은 본성에 따라 질주하고 행동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