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고정된 재료와 형식을 넘어, 확장해 나가는 김우진의 유토피아

백지홍(광주 신세계갤러리 큐레이터)

 

2023년 현재, 가장 왕성히 활동하는 젊은 조각 작가로 김우진 작가를 소개한다면 반대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동물 조각으로 카테고리를 좁힌다면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는 것도 가능하다. 미술관과 갤러리를 비롯한 전통적인 전시 공간은 물론, 백화점, 쇼핑몰과 같은 일상과 밀접한 공간, 나아가 공원, 숲속 등 야외 공간까지 사슴과 말 등 동물의 형상을 한 김우진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유닛들로 이뤄진 동물들은 직선을 중심으로 한 세련된 형상과 선명한 색채 그리고 깔끔한 마감이 어우러진 특유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며 작품을 만든 이가 김우진 작가임을 멀리서도 알아보게 한다. 때로는 알록달록 귀여운 동물 친구들 같고, 때로는 사색에 잠긴 산신의 모습 같기도 한 그의 작품들에 대해 알아보자.

 

사육사를 꿈꾸던 조각가와 그의 동물들

김우진 작가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는 어렸을 적 꿈은 사육사였다라는 작가의 말로 시작하곤 한다. 동물들과 함께하고 싶었던 소년은 꿈을 간직한 채 미술대학에 진학한 청년이 되었고, 조각을 통해 함께하고 싶었던 동물들의 모습을 만들기 시작했다. 작가와 관련한 가장 이른 시기의 비평 중 하나인 최가정 평론가의 김우진의 동물에서는 사육사의 꿈을 바탕으로 동물 형상을 만드는 김우진 작가와 수의학을 공부하며 말을 주제로 조각을 제작한 데보라 버터필드Deborah Butterfield 작가의 유사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렇게 작가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창작열은 이론이나 외부의 영향을 받아서 시작된 경우와 달리 긍정적인 방향으로 오랜 세월 지속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작품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작품을 감상하는 이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진다.

다양한 동물 중에서도 김우진 작가를 사로잡은 것은 역시 사슴과 말이다. 머리 위에 나뭇가지와 닮은 화려한 뿔을 얹고 있어 동물과 식물, 나아가 지상과 천상의 중개자로 여겨지기도 하는 신비로운 동물 사슴과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 되었음에도 특유의 우아함과 강력함을 잃지 않은 말은 다양한 동물 중에서도 작가를 대표하는 동물로 자리 잡았다.

그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어린 시절 작가가 실제로 만났던, 자신의 키보다 훨씬 커 우러러보아야만 했던 동물들의 인상이 작가가 품고 있는 창작열의 근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두 동물은 어느덧 성인이 된 작가의 눈에도 비교할 바 없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조소를 전공한 작가가 두 동물을 모델로 삼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김우진 작가가 만들어 내는 작품의 크기와도 연결된다. 작가의 작품 스타일이 완성된 이래 작업의 대표 사이즈는 언제나 실제 동물보다 약간 큰 크기였다. 이는 어린 시절 동물을 올려다보며 느꼈던 감각을 전하고자 성인이 된 작가에 비례하여 동물의 크기를 키운 결과다. 작가는 이에 대해 큰 작품을 밖에 놓고 싶어 조각한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농담처럼 진심을 전하기도 했다. 이제 김우진 작가의 곁에는 어린 시절에 그랬듯이 고개를 들어 올려볼 때야 시선을 마주하게 되는 거대한 말과 사슴이 있다. 이들이 작가의 품을 떠나 세상으로 나설 때, 그들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사슴과 말은 오랜 세월 인류에게 친숙한 동물이었지만, 인구 대다수가 도시에 거주하는 오늘날 두 동물과의 조우는 그 자체로 일상에서 벗어난 예외적 순간을 만들어 낸다. 또한 실제 동물보다 거대한 크기는 커다랗게 표현된 사슴과 감상자가 마주하는 순간 존재감을 증폭하며 작품이 존재하는 곳의 분위기를 완전히 변모시킨다. 김우진 작가에 대해 처음 평했을 때 전시 공간, 특히 제의적 성격이 강한 미술관에 전시된 작가의 작품은 신비한 동물을 넘어 신상처럼 보임을 언급한 바 있다. 디테일한 묘사가 생략됨으로써 동물의 표정과 시선이 감상자의 내면을 담아내며 더욱 강한 교감을 끌어낸다는 설명을 덧붙였었다. 김우진 작가와의 첫 만남으로부터 흐른 7년의 세월 동안 그의 작품이 만드는 예외적 순간은 우리의 일상 속으로 침투해 왔다. 그의 작품은 미술관 등 전시 공간의 내부에 머무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때로는 쇼핑을 위해 찾은 백화점 한복판에 서서 화려한 옷을 입은 친근한 표정으로, 때로는 나무 사이, 벌판 위에 서서 언제라도 움직일 것 같은 생명력을 품은 모습으로 우리의 일상에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 작품이 설치된 공간은 작품이 없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된다. 감상자가 작품과 마주한 그 순간만큼은, 바로 그곳이 동물들과 만났을 때 느꼈던 행복과 경외감이 전해지길 바랐던 김우진 작가의 유토피아가 된다.

 

플라스틱 의자와 함께한 시작

김우진 작가의 유토피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13년이다. 첫 개인전Lost Memory#1(노암갤러리)Lost Memory#2(EDA갤러리)를 통해 동물 작품을 세상에 선보인 해가 바로 2013년이기 때문이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플라스틱, 그중에서도 편의점이나 술집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등받이 없는 플라스틱 의자를 재료로 제작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새로운 소재를 찾아 고무대야를 이용해 작업하던 그의 눈에 작업실 곳곳에 있던 플라스틱 의자가 눈에 띄었고, 색상과 형태에 매력을 느낀 작가는 플라스틱 의자라는 재료의 가능성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2013년 전시에서 김우진 작가는 동물 형상의 작업과

함께 플라스틱 의자를 자르고 붙여 추상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을 함께 선보이며 플라스틱의 물성 자체에 주목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어진 개인전PLASTIK!(HNU갤러리, 2014)Plastic story(DDG갤러리, 2015) 역시 제목에서부터 플라스틱이라는 재료를 강조했다.

플라스틱 의자의 형태와 색상을 그대로 살려 새로운 조형성을 선보인 김우진 작가의 작품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비평이 이어졌다. 최가정 평론가의김우진의 동물(2014)을 비롯해 조은정 평론가의순환되는 자본의 메타포(2015), 강유진 학예연구사의시간을 묶는 사육사를 품은 박제사-작가의 태도와 재료가 작품의 양태가 될 때(2016) 그리고 필자의김우진: 자연적인 그리고 인공적인, 플라스틱 토템(2016)까지 이 시기 김우진 작가의 작업에 관해 평할 때는 동물 형상의 의미만큼이나 플라스틱 의자라는 재료의 의미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우리의 일상 가까이, 낮은 곳에 위

치하는 플라스틱 의자가 받은 평가는 예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대량생산’(최가정), ‘싸구려’, ‘산업의 물질’(조은정), ‘임시적이며 가벼운 물건’, ‘값싼 재료’(강유진), ‘산업사회의 공산품’, ‘저렴함의 상징’(백지홍). 인공물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플라스틱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자연스럽게 산업사회, 자본주의, 환경파괴라는 화두를 끌고 왔고, 플라스틱 오브제를 자연을 대표하는 동물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며 주제 의식을 발전시켰다는 사실은 작품에 대한 비평의 중심에 있었다. 필자 또한 김우진의 작품을 플라스틱 토템이라 부르고 일상품을 예술 작품 또는 신령스러운 상징물로 만들어 내는 아이러니를 말하며 평가를 마무리한 바 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김우진 작가의 작업을 살펴보면 플라스틱 의자라는 재료는 지금까지 논의한 주제 측면보다 오히려 형식적인 측면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성형이 용이하다는 그리스어 어원plastikos을 갖고 있는 플라스틱의 강점은 역시 3D 프린터 등을 통해 자유로운 성형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김우진 작가의 작품에서 플라스틱은 오히려 고정된, 그래서 조형에 일정 정도 제약을 주는 재료로 등장한다. 필요에 따라 새롭게 사출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개입하기 전부터 형태가 정해진, 기성품 플라스틱 의자의 다리 부분을 잘라 만든 유닛들을 마치 레고의 블록 조각처럼 쌓아 올려 작품을 제작하기 때문이다. 이들 유닛의 형상과 플라스틱 의자가 원래부터 갖고 있던 알록달록한 색상은 어느새 김우진 작가를 대표하게 되었다. 조은정 평론가는 각 플라스틱 유닛을 storke’에 비유하기도 했다. 고흐의

회화에서 물감의 터치가 전체 작품의 형태만큼이나 미학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김우진 작가의 작업에서 플라스틱 유닛들은 사슴이나 말 등 완성된 형태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앞서 김우진 작가의 작품은 멀리서도 작가의 작품임을 알아볼 수 있다고 말한 이유는 바로 이 알록달록한 유닛들의 조합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미감 때문이다. 특히 플라스틱의 가벼운 느낌을 덜어내고, 개별 유닛들 사이의 통일감을 주기 위해 유닛마다 덧입혀진 검은색 테두리와 질감 표현은 화룡점정처럼 작가의 스타일을 완성해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스타일은 동물을 주제/소재 삼아 창작을 이어가는 다양한 작가들 사이에서 김우진 작가가 빠르게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 낼 수 있게 했다. 2013년 시작된 플라스틱 동물들의 행진은 2016년에 이르러 두 차례의 개인전Plastic story(DDG갤러리)사육사의 꿈(대전 롯데갤러리)을 비롯하여김우진, 백윤호 이음전(리솜포레스트 서로 아트스페이스), 김우진, 노주용 찬란한 여름(갤러리 고트빈), 공립미술관의 초대로 개최된모험도감: 넥스트코드(대전시립미술관)까지 이어지며 미술계에 자신만의 입지를 확실히 다졌다.

 

플라스틱에서 스테인리스로, 변화와 확장의 시기

2017, 김우진 작가의 작품 세계에 변화가 나타났다. 플라스틱 동물들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펼쳐온 김우진 작가가 작품의 주재료를 플라스틱에서 스테인리스 스틸로 바꾼 것이다. 주제와 형식 양 측면에서 플라스틱이 차지했던 위상을 생각하면 거대한 변화라 할 만하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변화에도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을 알아보았다는 점이다. 이는 재료가 변화했음에도 유닛을 쌓아서 제작하는 작품의 조형 방법을 그대로 유지하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실제로 2017년도에 제작된 스테인리스 스틸 작업들은 플라스틱 유닛을 비슷한 크기와 형태의 스테인리스 스틸 유닛으로 변화시켰다는 점을 제외하면 형태가 거의 동일하다. 플라스틱 의자의 사출 색과 유사한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을 스테인리스 스틸에 칠하고, 테두리 부분을 검은색으로 마무리하는 방식까지 유지함으로써 얼핏 본다면 재료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조금 더 선이 깔끔하고 색이 진해졌다는 느낌 정도를 받을 수 있을까.

재료에 변화가 일어난 가장 큰 이유는 작품을 만들고 전시하는 경험이 늘어날수록 마주하게 되는 플라스틱, 그중에서도 기성품 플라스틱 의자라는 재료의 한계 때문이었다. 플라스틱 의자가 본래 가지고 있던 알록달록한 색상이 오늘날 김우진 작가 하면 떠오르는 다채로운 색상의 뿌리가 되었지만, 막상 색상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고 보면 플라스틱은 한계가 명확한 재료였다. 시중에 판매되는 색깔 이외의 색을 사용하기 위해 도색&a